본문 바로가기

술과 막걸리의 역사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술을 마셨을까요? 농경 민족인 우리 민족은 아주 옛날부터 쌀, 보리 등의 곡물 농사를 지었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작물들은 주요한 식량이 되었고, 술을 담그는 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술과 막걸리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남북국 시대 이전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시대) 이전의 역사서에서 술과 관련된 자료들은 매우 드문 편입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술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우리는 언제부터 술을 마셨을까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부여의 영고, 예의 제천, 고구려의 동맹 등의 축제에서 술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의 「동명왕 편」고구려 건국설화에는 하백이 해모수에게 술을 대접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당시에 어떤 술을 마셨는지는 나오지 않으나 고대의 추수감사제 성격인 제천의식에서 술을 마신 것으로 보아 당시 농사의 생산물인 곡물로 술을 빚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의 탄화된 쌀과 조

1988년 임진강에 접한 경기도 연천의 절벽토층에서 고구려의 불에 타서 탄화된 쌀과 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술의 주요 원료가 되는 쌀농사가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

백제의 금주령 반포

『삼국사기』권 23 백제 다루왕 11년의 기사에는 흉년이라 금주령을 반포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삼국유사]

탁주 료(醪)

『삼국유사』「기이」편에는 가야 왕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마신 술로 탁주 료(醪)가 나옵니다. 이 기록은 가장 이른 시기에 발견된 탁주(막걸리) 관련 기록입니다.

[주령구 복제품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신라 사람들의 술문화 흔적 주령구

1975년 경주 월지에서는 주령구(酒令具)라는 작은 물건이 출토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사위로 각 면에 여러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주령구는 사각형과 육각형의 면이 각각 6개와 8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술자리의 벌칙이 적혀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만든 주령구 벌칙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사각형인 여섯 면의 벌칙

  • 금성작무(禁聲作舞) : 음악 없이 춤추기
  • 중인타비(衆人打鼻) : 여러 사람 코 두드리기
  • 음진대소(飮盡大笑) :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삼잔일거(三盞一去) :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 유범공과(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 자창자음(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육각형인 여덟 면의 벌칙

  • 곡비즉진(曲臂則盡) : 팔뚝을 구부려 다 마시기
  • 농면공과(弄面孔過) : 얼굴 간질이어도 꼼짝 않기
  • 임의청가(任意請歌)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시키기
  • 월경일곡(月鏡一曲) : 월경 한 곡조 부르기
  • 공영시과(空詠詩過) : 시 한 수 읊기
  • 양잔즉방(兩盞則放) : 술 두 잔이면 쏟아버리기
  • 추물막방(醜物莫放) :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않기
  •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 스스로 괴래만(도깨비)을 부르기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이전 시대보다 술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들이 발견됩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 술의 3가지 주종인 탁주(막걸리), 청주, 소주가 완성되는 시기였습니다.

[고려사]

고려 시대에도 주점이?

고려 시대에는 수도 개경에 성례(成禮), 낙빈(樂賓), 연령(延齡), 영액(靈液), 옥장(玉漿), 희빈(喜賓) 6곳의 주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국가에서 설치한 일종의 국영 주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당시에 어떤 술들이 있었는지 기록된 바는 없습니다. 아마도 쌀 등의 곡물로 빚은 술을 팔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국영 주조 관청인 양온서(良醞署)도 있었습니다.

[고려도경]

송나라 사신 서긍이 기록한 고려의 술

1123년 고려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당시 고려사람들의 술문화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보입니다.

“고려 사람들은 누룩과 멥쌀로 술을 빚고, 독한 술을 즐기며 귀족층은 정부 관청인 양온서에서 만드는 술을 마시나 평민들은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귀족층이 마셨던 좋은 술은 아마도 청주였을 것이고, 평민들이 마셨던 박하고 짙은 색깔의 술이 막걸리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주를 증류시킬 때 사용하는 소줏고리]

탁주(막걸리), 청주, 소주

원나라 간섭기에는 몽골의 여러 문화가 유입됩니다. 이때 들어온 것이 바로 증류식 소주입니다. 소주는 탁주(막걸리) 등 발효주를 증류시켜서 만듭니다. 소주는 도수가 매우 높고 생산되는 양이 적은 고급 주종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마시기에는 가격도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귀족층이나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술의 윗부분을 떠낸 맑은 술인 청주와, 청주를 떠내고 남은 술밑 혹은 청주를 떠내지 않은 그대로를 걸러서 먹는 탁주(막걸리), 그리고 이런 발효주들을 증류해서 만드는 소주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소주를 만드는 방법

발효주를 어떻게 증류시켜서 소주를 만드는지
국립민속박물관 김승유 학예연구사의 설명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술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주조법을 기록한 다양한 조리서도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또한, 양반들이 하루하루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던 일기자료도 있습니다.

금주령의 나라 조선!

조선 시대에는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흉작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에 걸쳐 빈번하게 금주령이 시행되었습니다. 특히 태종 때에는 거의 매년 내려졌고 성종과 연산군 때도 빈번히 내려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금주령이 대체로 사라졌으나 1758년 영조 34년에 큰 흉작으로 인해 왕실의 제사에도 술 대신 차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금주령은 주로 가뭄이 심한 봄·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금주령이 시행되는 기간에도 예외적으로 음주가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국가의 제향, 사신 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였다고 합니다. 금주령은 뒤에서 살펴볼 1960년대의 쌀생산 부족으로 인한 쌀막걸리 생산 금지와 유사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금주령 어기면 사형까지?

조선 후기 영조 대에는 금주령을 어기면 매우 심하게 처벌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영조 38년에는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신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을 참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JTBC 표창원의 <사건반장>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자세히 사건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표창원의 <사건반장>
[사건 평행이론] 금주령 어기면 사형? 조선시대 ‘음주와의 전쟁’

조선시대 양반의 필수품, 술

조선 시대는 철저한 유교사회였습니다.
당시 지배층인 양반들은 유교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모범으로 여겼습니다.

유교 문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조상에 대한 숭상인 제사 모시기였습니다. 또 하나는 양반들 간의 교류인 손님 모시기입니다. 양반의 주된 일상은 대부분 제사와 손님 모시기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일기자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제사와 손님 접대라고 합니다. 이때 가장 필요한 음식물이 바로 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양반가에서는 집집마다 가양주 문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부유한 양반들은 주로 청주나 소주를 마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반들도 종종 일반 백성들이 마시는 막걸리도 마셨습니다.

조선 시대 조리서 전시관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조리서들이 발간되었습니다. 조리서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술 담그는 방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국립민속박물관 온라인 전시관으로 가서 조선 시대 주조법이 기록된 다양한 조리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시관 입장

수운잡방 (1500년대)

주방문 (1600년대)

고사촬요 (1554년)

산림경제 (1715년)

세시풍속과 술

우리 민족은 설날, 대보름, 단오, 추석 등 여러 명절을 즐겁게 보내는 전통이 있습니다. 기쁜 명절날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었습니다. 명절날 마시는 술로는 설날에 마시는 도소주와 정월 대보름날 마시는 귀밝이술이 있습니다. 단옷날 마시는 창포주도 유명합니다.

  • 1월 설날 도소주
  • 1월 보름 귀밝이술(이명주)
  • 2월 사발술
  • 3월 삼짇날 삼해주, 청명주, 소국주,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
  • 5월 단오 창포주
  • 6월 유두절 창포주
  • 6~7월 삼복 과하주
  • 8월 추석 신도주(햅쌀술)
  • 9월 중앙절 국화주
  • 12월 납일 납주, 도소주, 백엽주, 초백주

[이사벨라 비숍과 그가 남긴 책에 실린 한국 농부들의 반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술을 얼마나 자주 마셨을까?

구한말에 한국을 여행한 많은 유럽인은 한국 사람들이 술을 무척 많이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쓴 이사벨라 비숍(Bishop, Isabella Bird)은 한국 사람들의 음주 문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러워서 주정뱅이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중략) 내가 한강을 여행하며 관찰한 결과로는 취해 버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도 아니다.”

[김광계 매원일기]

그렇다면 실제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요?

조선 시대 경상도 예안에 살았던 양반 김광계의 일기인 『매원일기(梅園日記)』는 1603년부터 1645년까지 거의 40여 년간의 생생한 생활사 자료입니다.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음주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가운데 1603년, 1605년, 1607년의 3년간의 음주기록을 살펴보니 각각 28회, 55회, 55회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평균적으로는 한 달에 약 3~4회 정도 음주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마신 것으로 나타나는데 생각보다 음주 빈도가 매우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광계는 대부분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대접하는 양반의 책무를 지키기 위해서 술을 마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마신 술은 청주, 소주, 막걸리 등 주종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양조장의 등장과
가양주 문화의 단절

조선 시대에는 집에서 직접 만드는 가양주와 주막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술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소규모 가양주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래된 전통은 일제강점기 주세법 등이 시행되면서 공장제 양조장으로 전환되기에 이릅니다.

1909년 주세법의 시행

일제는 전국의 소규모 양조업을 통합하고 세원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에 주세법을 시행합니다. 주세법 시행 당시 주막 등에서 소규모로 술을 만들던 업자는 155,832개로 파악되었습니다. 이것을 면허제로 바꿔서 해마다 제조할 술의 양을 소속 세무서에 신고하고 생산량에 따라 과세하는 것이 주세법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규모 업자들 모두에게 면허를 주었습니다.

<주세 연초세 징수공지문>은 술과 담배를 생산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을 알리는 문서입니다. 세금을 납부한 후, 재무서에서 발급한 표를 받은 사람만이 술과 담배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주세 연초세 징수공지문]

1916년 주세령의 시행

1909년 반포된 주세법은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술제조 면허를 부여한 비교적 느슨한 규제였다면 1916년 반포된 주세령은 더욱 강력한 양조업 규제책이었습니다. 주세령은 모든 자가제조 술의 생산을 엄금하고, 술의 제조권한을 제한 면허제로 변경하였으며 술의 과세율을 상향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 1933년 당시 허가된 자가용 술 제조자는 단 한 명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1916년 1918년 1922년 1926년 1928년 1930년 1933년
자가 제조자수 306,788 375,757 229,935 131,750 34,865 11 1
자가 탁주 제조자수 289,356 358,112 217,920 127,529 32,066 11 1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으로 인해서 한국의 양조업은 공장제 규격화가 이루어졌으나 오랜 기간 내려오던 각양각색의 전통 가양주 문화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허가 없이 술을 빚는 것은 밀주로 엄격히 단속되었습니다.

대신 전국 방방곡곡에는 양조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생긴 양조장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맛 좋은 막걸리를 생산하는 곳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EBS 교육방송의 유튜브 영상 <사라진 전통주>에는
일제강점기 전통주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막걸리 흥망사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야말로 막걸리와 양조장 전성시대였습니다. 쌀 생산 부족으로 인한 쌀 막걸리 금지와 부활, 막걸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맥주와 소주의 부상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이 시기 가장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던 술은 바로 막걸리였습니다.

광복 이후 양조장의 폭발적 증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던 양조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60년대에는 전국에 무려 4,000여 개의 양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양조장들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으며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막걸리는 변질의 문제 때문에 유통기간이 짧았습니다.
특히 당시만 해도 냉장 시설도 별로 없었고, 저온 살균법 등으로 장기간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한 막걸리도 없었기 때문에 양조장은 흡사 주막집처럼 면 단위마다 1~2곳은 있었습니다. 1960~70년대를 보낸 사람들은 대개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양조장에 술을 받으러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양조장들은 소량의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서 판매하기도 했고, 술집에는 자전거나 수레를 이용해서 말통에 담아서 판매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근거리에서 짧은 기간에 생산해서 소비되는 구조였습니다.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1961) 중 대폿집

1960~1970년대 영화에는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원형 테이블에서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막사발에 따라서 마시는 모습은 당시 대폿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대폿집은 양조장 막걸리의 주요 소비처였습니다.

1982년 경기도 포천 이동막걸리 양조장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1980년대 경기도 포천의 이동막걸리 양조장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양조장을 담은 영상으로는 매우 희귀한 영상으로 당시 양조장의 모습을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1970년대 쌀소비 절약을 위한 혼분식 장려 포스터]

쌀막걸리 생산 금지

과거 우리나라는 쌀 생산이 부족한 나라였습니다. 정부에서는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생산성이 뛰어난 통일벼를 들여와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정부고시문]

식량으로 사용되는 쌀이 부족한 마당에 쌀로 술을 제조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1963년 2월 26일에 ‘탁주 제조자에 대한 원료 미곡의 사용 한시적 금지 조치’를 발동하였습니다.

1966년 8월 28일부터는 아예 백미를 주조에 사용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66년부터 1990년까지 약 24년간은 그동안 막걸리의 주원료로 사용되던 쌀 대신에 밀이 원료로 사용됩니다. 양조업체는 처음에는 강하게 반발하지만, 오히려 이 시기가 막걸리 양조장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쌀보다 밀이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었고 의외로 밀로 만든 막걸리의 맛도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애주가들은 밀로 만든 막걸리의 맛에 길들어 갑니다.

1960~70년대 이후 막걸리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 시작

한편으로는 1960~70년대에 들어오면서 막걸리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이 언론을 통해 심심치 않게 나타납니다.

[경향신문 1966년 8월 27일]

여름철 배탈의 원인
유해 막걸리

막걸리는 상온에서 잘못 보관했을 때 변질할 수 있기 때문에 냉장 시설이 충분하지 못했던 1960~70년대에는 여름에 막걸리를 먹고 탈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1974년 2월 20일]

물 탄 막걸리

일부 양조업자들은 막걸리의 양을 늘리기 위해 물을 과도하게 타는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77년 11월 4일]

화공약품이 들어간 막걸리

일부 양조업자들은 막걸리에 화공약품을 섞어서 팔기도 하여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95년 8월 19일]

감미료 사카린의 유해성 논란

단맛을 내기 위해 막걸리에 첨가했던 사카린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사카린은 현재는 인체에 무해하다는 결론이 났지만, 당시만 해도 여러 논란이 있던 인공 감미료였습니다. 현재 생산되는 막걸리에는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 대신 아스파탐이 들어가 있습니다.

[경향신문 1969년 12월 17일]

유해 막걸리 식별법

이렇게 불량 막걸리가 시중에 풀리다 보니 신문에는 유해한 막걸리를 식별하는 법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달고 쓴맛이 나는 막걸리, 색깔이 너무 고운 막걸리, 너무 빨리 가라앉는 막걸리 등은 품질이 좋지 않고 약품을 섞은 것일 수 있으므로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 권장합니다.

[대한뉴스 제1163호]

1977년 ~ 1979년 쌀막걸리 일시적인 허용

정부와 농민들의 노력으로 1977년에서 1979년에는 대풍년이 오게 되어 남아도는 쌀을 소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쌀막걸리를 허용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 동안 말통으로만 생산되던 막걸리가 1리터짜리 폴리에틸렌 병에 담겨서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동아일보 1977년 12월 8일]

14년 만의 귀환, 쌀막걸리

14년 만에 쌀막걸리가 다시 등장하자 시중에는 일시적으로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맥주와 소주의 소비가 일시적으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 1977년 12월 8일]

쌀막걸리 제맛이 안 난다

14년 동안 밀막걸리의 텁텁한 맛에 길든 애주가들은 쌀막걸리가 밀막걸리보다 맛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판매가 잘 되기는 했으나 사람들의 입맛은 이미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경향신문 1979년 11월 1일]

1979년
쌀막걸리 다시 금지

1979년부터는 다시 쌀 생산이 줄어들면서 쌀막걸리의 생산이 금지되고 2년 만에 밀막걸리가 다시 등장합니다.

[경향신문 1990년 2월 28일]

1990년
쌀막걸리 완전 자유화

1989년 연말부터 정부는 쌀막걸리 제조 허가에 대해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990년에는 쌀막걸리의 제조가 다시 허용됩니다.

[맥주, 소주, 탁주의 출고량과 점유율]

강력한 라이벌, 희석식 소주와 맥주의 등장

1982년까지 막걸리는 전체 주류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의 절대 강자였습니다. 하지만 막걸리의 품질 문제와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하여 점차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게 됩니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막걸리의 점유율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1990년대에 잠깐 다시 부흥하는 듯했습니다만 2000년대 초반에는 10%도 되지 않는 위기에 몰립니다. 이런 시기에 주류시장을 자연스럽게 차지했던 주류가 바로 맥주와 희석식 소주였습니다.

[1970년대 오비맥주 광고]

[1980년대 크라운맥주 광고]

도시, 근대, 세련미의 상징 맥주

맥주는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도시화, 근대화, 세련미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영화에는 이런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던 1960년대의 영화에는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근대화, 도시화의 상징이었습니다.

1970년대 대학가에는 생맥주 호프집이 등장했습니다. 젊은 대학 지성인의 상징은 생맥주와 호프집이었습니다.

교통이 발전하던 시기 기차 객실에서 마시는 맥주는 당대의 유행 감성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캔맥주보다는 병맥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영화 ‘시발점’(1969)]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영화 ‘가시를 삼킨 장미’(1979)]

[1970년대 금복주 CM송과 당시 자료 사진]

희석식 소주

증류식 소주는 막걸리 등 발효주를 증류해서 만드는 술로 추출되는 양이 적어서 가격이 비싼 고급술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 등을 발효시켜 만든 원액을 증류해서 추출한 알코올을 물에 희석해서 도수를 20도 정도로 만드는 술로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희석식 소주는 막걸리와 달리 변질할 위험도 없었기에 유통도 간편했고 가격도 매우 저렴했습니다.

1970년대 진로소주의 광고 문구는 ‘땀흘린 보람 뒤엔 언제나 진로’였습니다.

희석식 소주는 1996년 지역 판매 제한이 폐지되기 전에는 도마다 한곳씩만 허가가 되어 그 지역에서만 유통되었습니다.

맥주·소주 전시관

지금까지 막걸리의 강력한 라이벌인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국립민속박물관 맥주와 희석식 소주 전시관으로 가서 관련 유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시관 입장

크라운맥 광고전단지

백화 소주병

금복주 소주병

금광 소주병

보배 소주병

1990년대 막걸리의 부흥기

1990년대는 막걸리의 부흥기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침체하여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 시장을 많이 잠식당했던 막걸리도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1990년대 막걸리 시장의 몇 가지 달라진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막걸리에 걸려 있던 여러 가지 규제가 없어지게 됩니다. 1961년 주세법 개정 당시부터 유지되어 오던 막걸리의 지역 제한이 점차 없어지게 되어 2001년에는 판매지역 제한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막걸리 생산도 맥주와 희석식 소주처럼 규모가 큰 기업의 전국적인 유통망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막걸리의 텔레비전 광고도 등장합니다.

두 번째, 살균 막걸리가 등장하여 소주나 맥주처럼 상온에서도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보관과 휴대가 용이한 팩과 캔에 담긴 막걸리도 등장합니다.

세 번째, 그동안 불법이었던 가내 주조도 허가되어 그동안 근근이 밀주로 명맥을 이어갔던 지방의 여러 명주가 시장에 나타나게 됩니다.

1990년대 이동 쌀막걸리 TV광고

1990년대 전국단위의 막걸리 시장을 잡기 위한 업체들의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가장 먼저 시장을 선점한 회사는 포천의 이동 막걸리였습니다. 당시 텔레비전 광고를 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합니다.

국순당 쌀막걸리 광고

백세주로 유명한 국순당도 유명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기용하여 막걸리의 고급화를 추진합니다.

장수 쌀막걸리 광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의 장수막걸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서울 지역의 여러 양조장 연합체가 생산하는 막걸리로 현재도 시장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막걸리입니다.

지평주조 이랑이랑 스파클링 막걸리 광고

2010년대에는 지평주조가 등장하였습니다. 지평주조는 1925년부터 양조업을 한 아주 오래된 양조업체입니다. 지평주조는 탄산이 함유된 막걸리도 출시하는 등 막걸리의 현대화도 추진합니다.

막걸리의 세계화

1990년대부터 막걸리는 새로운 바람을 맞이합니다. 멸균 막걸리의 등장으로 유통기한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해외로의 수출도 가능해집니다. 1993년 인천탁주합동제조장은 「농주」를 개발하여 프랑스로 수출하는 성과를 냅니다. 1994년에는 포천의 이동막걸리가 월평균 5천 병 이상 해외로 수출되었습니다.

[진로 막걸리 TV 광고]

일본의 막걸리 열풍

해외에서 가장 막걸리가 인기를 끌었던 곳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수출되던 막걸리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희석식 소주와 함께 일본의 소매 시장을 파고들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한류 열풍과 함께 막걸리도 유행하였습니다. 한류스타가 등장하는 막걸리 광고도 등장했습니다.

일본에서 막걸리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피부 미용에 좋은 술로 알려졌습니다.

[나 혼자 산다 경수진편]

21세기 막걸리의 새로운 도전과 세계화

2000년대 이후 막걸리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막걸리는 소규모 가내 주조가 가능한 술이기에 자신만의 작은 양조장을 만들어서 막걸리를 만드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막걸리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주점도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막걸리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제 막걸리는 오래되고 텁텁하고 세련되지 않은 술이 아닌 누구나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젊은 술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막걸리가 써 내려가는 새로운 역사가 기대됩니다.